제가 어떻게 9년씩이나 상하이에 있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으로서 '말 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것'과 '어르신들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마지막으로는 아마 '가성비'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제가 좀 맡은 일이 많았거든요. 제 몸이 부서질 정도로요. 일 년에 한번은 꼭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러다가 죽을 수 있겠다고 하는 생각도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는 부서들을 맡고 있었으니까요. 대학부, 소망부, 지혜대학.... (사실 현재 청도한인교회 담임으로 계신 김주홍 목사님이 행정 목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 제가 사역이 많은 것을 인지하고 나름 형평성 있는 배려 차원에서 지혜 대학을 다른 사역자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당연히 반대를 표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역을 나누게 됩니다. 그때가 18년인가, 19년이었을 거예요.)
그 부서들을 맡겠다는 사람도, 동시에 맡을 수 있는 사람도, 거기에 덧붙여 여성 교구까지 감당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저라도 솔직히 인간적인 마음에서는 싫죠.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으니까요. 한 가지 부끄러우면서도, 아쉬운 고백은 하영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의 기억이 제게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는 게 거의 없어요. 그만큼 바빴거든요.
암튼, 해외다 보니 사역자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제가 상하이에서 목사를 시작한 케이스여서 목사 호봉도 그리 높지 않았고요, 자녀도 하나이다 보니 자녀 수당도 적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래저래 가성비(?)가 나름 나쁘지 않았어요. 경영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이유도 분명 제가 9년씩이나 있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것 같아요.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진 겁니다. 저로서는 코로나19로 인해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가 '강제적 안식년'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일종의 '희년'을 누릴 수 있게 된 거죠. 문제는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유학생들이 안 들어오고, 어르신들은 한 분, 두 분 귀국을 하게 되신 거예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학부와 소망부를 맡고 있던 저의 쓸모도 점점 사라졌겠죠?
게다가, 제가 여러 불편할 수 있는 제안을 자주 개진했거든요.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역자들을 내보내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해외의 특성상 성도들의 이동이 잦습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의 교체가 잦아요. 이런 상황에서 사역자들까지 그러면 공동체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성도들의 이동이야 제어할 수 없으나, 사역자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마음만 있고 배려만 있으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니 그렇게만 하면, 공동체성 강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아울러, 한국 교계 안에서도 부사역자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분담, 사명의 차이로 인해 부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사람이 분명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다고 했을 때 본인이 동의를 하면 그렇게 계속 사역의 자리를 보장해 주면 서로에게 분명 좋을 것 같았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에도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를 품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 가치에 들어맞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성도들에게 본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서 이런 제안을 수차례 했더랬죠. 하지만 별로 좋아지 않더라고요. 제가 본 교회는 '경영의 효율'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제안을 뚜렷하게 했지요.
생명 없는 건물을 포기하고,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교민이 있어야 교인이 있고,
교인이 있어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으니,
이에 따른 실천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