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들, 근거를 댈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직접 해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선호하며, 제가 (시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종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이제까지 거의 그래왔습니다. 아울러, 과거의 경험은 현재와 미래의 근거와 이유가 됩니다. 물론, 그것의 한계에 빠질 수도 있지만 최대한 그 부분도 고려하면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과거 부사역자 시절의 경험, 특별히 남들이 하는 것들을 따라 하기보다는 마주하는 목회 현장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창의적으로 시행했던 오랜 시간의 경험들이 제게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말하자면, 그때의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사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 <세우는교회>에서 시행하(려)는 것들은 사실 과거에 이미 해봤던 것들입니다. 정확히 같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같은 방향성 안에서의 적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걸 배웠어요. 소위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차이, 그 안에서 파생되는 문제 및 어려움, 그것을 위한 대처 및 대응 방안 같은 것들을 그때 수많은 대상의 여러 차례의 시도를 통해 정립해 놓은 것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의 확고한 신념이 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도 제시할 수 있고요.
돕고 살리는 사역을 하면서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요. 겉으로는 멀쩡한 아이들이 실은 속으로 썩어 있다는 것을, 아무리 봐도 부잣집 아이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가난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반대로, 돈 없다고 장학금을 '당당하게' 신청하는 아이가 실은 부잣집 아이인 것도 봤고요, 오히려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기 싫어서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는 것도 그때 배웠더랬죠.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최소한 그들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배웠고요, 그런 맥락에서 '네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을 제공해 주는 거야'라는 것이 아닌, '공동체 소속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것이니 마음껏 누려도 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보편적 복지'의 시행이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도 세워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그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지의 여왕'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일부 '도덕적 해이'가 일어난 일부의 사례를 마치 전부인 것인 양 조장하고, 그와 같은 인식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대한 도움을 막는 경우들이 있더라고요. 제도와 정책의 의도와 방향성이 아닌, 일부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을, 마치 그 제도 자체가 무용한 것처럼 만드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약자들의 기회를 아예 차단시켜버리는 일들이 우리 사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복지의 여왕>
로널드 레이건은 1976년 한 빈곤층 출신 흑인 여성이 네 명의 죽은 남편으로부터 베테랑의 복리후생과 사회보장 혜택을 사취하고 80개의 다른 가명을 사용함으로써 쉬운 삶을 사는 모습을 묘사한 매우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이로 인해 백인 보수층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어 1980년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큰 기여한 명연설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정치적 성공에 일등공신 노릇을 한 그 복지 여왕은 실제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게 훗날 밝혀졌음에도 레이건의 정치적 커리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납세자들의 돈으로 쉽게 살기 위해 복지 시스템을 통해 정부를 속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한동안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굉장히 끔찍한 이유는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 혐오의 결합체적인 선동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진보진영에서는 복지 여왕이 여성, 흑인, 빈민이 아니라 남성, 백인, 부유층이었으면 혐오 선동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출처 : 리브레 위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 우주에서 가장 엄청난 낭비에 대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당을 다 챙겨준 포도원 주인의 그 마음가짐과 실천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감을 우리는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어떤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억합니다.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이웃의 삶을 알아야 할 것이고, 이웃의 입장에 서봐야겠습니다. 나는 혹 필요하지 않아도, 남을 위해 찬성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시행하는 여러 복지 정책에 대해서 '일단은 받으시라는 것'이 결국 그 맥락에서의 요청입니다. 일단은 보편적으로 받으시는 것들에 대해서는 받으시고, 본인이 정 필요가 없으시다면 다시금 헌금을 드리는 것이 오히려 나은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나'를 넘어 '나'를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편적 복지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정작 본인이 혜택을 받지 않으면, 자신만 빼놓고 주변 사람들이 받으면 대체로 서운해하더라고요. 사람 마음 다 똑같지 않던가요? 돈 있는 사람도 똑같더라고요. 괜히 의식 있는 척,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그 기회를 빼앗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고 시행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이고,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임, 어찌됐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자는 것입니다.